[수필]육체는 슬퍼라 by 황인숙
by 첼시황인숙(1958~)
시인 황인숙은 1958년 12월 21일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가 당선되면서 시단에 데뷔했다. 시집으로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슬픔이 나를 깨운다』,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자명한 산책』, 『리스본行 야간열차』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나는 고독하다』, 『육체는 슬퍼라』, 『인숙만필』, 『일일일락』, 『이제 다시 그 마음들을』 등이 있다. 1999년 동서문학상을, 2004년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기차간에서 '삶의 온도'로부터 얻은 위안
몇년 전 마음을 달래려고 부산으로 훌쩍 떠난 적이 있었다. 당시 나를 막냇동생처럼 아껴주던 선배에게만 새벽 기차 타고 부산에 다녀오겠노라고 털어놓았었다. 그 선배가 삶은 달걀과 바나나우유를 사줄테니 기차 타기 전에 자기를 꼭 보고 가라고 얘기하길래 '달걀과 바나나우유라니, 80년대 같네. 하하'라고 생각했었다. 역으로 출발하기 전에 만난 선배가 건넨 것은, 약속한 달걀과 바나나우유, 그리고 책 한 권. 내가 이걸 읽고 위안을 받았으면 좋겠다며 건넸던 그 책, 『육체는 슬퍼라』
얼핏 보기에 염세주의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그 제목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기차간에 앉아서 한 장, 두 장 넘기면서 이 울적해보이는 책이 시나브로 마음에 와닿기 시작했다. 마침 그 때 나는 롤러코스터의 <겨울은 가고>를 한창 듣고 있었는데, 노랫말의 '어디로 자꾸만 가고 싶어 거리는 마법에 걸려 물방울무늬 스커트는 흔들려'와, 책 속 '비 오는 날, 스커트를 입고 맨종아리로 '빗방울의 리듬'에 맞추어 길을 걷는 건 얼마나 기분 좋은가'라는 구절이 함께 어우러져 참말로 기껍게 느껴졌다. '물방울무늬 스커트'와 '빗방울의 리듬'이라니!
그리고 시장은 다시 괴괴하다. …(중략)…더욱이 이 집 사람들은 이 소음의 발생자가 나라는 것을 잠결에도 아는 것이다. 그들은 나를 거의 사랑하는 것 같다. 생각하면 참 이상하다. 그들은 왜 나를 사랑할까? 나의 시를 보지도 못했고 봐도 잘 모를, 아마 내 시 자체에는 관심도 없을 사람들인데, 한밤의 소란에 너그러운가?
출간될 당시(2000년 1월)를 감안해보면, 이 산문집에 실린 그녀의 글은 90년대에 쓰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표현들이 눈에 설기도 하면서 왠지 정감이 간다. 불이 꺼져 괴괴해진 시장을 지나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는 그녀의 모습과, 그때 그녀가 느꼈던 감상을 읽으면서 삶에 대해 곱씹게 되었다. 더욱이 그녀가 시를 쓴다는 사실을 알고는, 뭔가 알 수 없지만 벅찬 감동에 젖어, 그녀에게 "얘, 너 시 쓴다며?"라고 말을 붙이는 야채 장수 아주머니를 보면서 내 기분도 덩달아 묘해졌다.
이 세상에 '형도' 같은 사람은 없네
그녀의 입을 빌려 전해 듣는 기형도의 이야기를 읽고는 다시금 기분이 울적해졌다. 그동안 기형도의 시를 읽거나, 산문을 뒤적거릴 때는 그의 죽음이 그리 실감나지 않았었다. 허나 황망함이 느껴지는 그녀의 글 속에서 기형도의 부재가 다시금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의 죽음이 유독 애달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의 삶 속에 자리잡은 고뇌와 쓸쓸함이 뼈아프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육체는 슬프고, 마음은 어렵기에. 그리고 이 세상에 '형도'같은 사람은 다시 볼 수 없기에.
※이전에 읽었던 기형도의 책 → 2014/01/28 - [문학]기형도 전집 by 기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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