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lsea Simpson

[소설-일반]달과 6펜스 by 서머셋 몸

by 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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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私談 : 1999년 크리스마스, 그리고 마지막 추억을 기록하는 순간

최근 기록하는 독후감의 대상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나는 지금 오래된 책들을 정리하고 있다. 출간된 지 적어도 10년은 지난 묵은 책들―대부분 20년 가까이 된 녀석들이다―을 내보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대개 물건을 오래 두고 쓰는 편이고 책에 대한 애착이 유달리 강해서 모든 장서를 다 간직하고 싶었다. 하지만 책장이 부족하다는 민원(...)이 들어와서, 하릴없이 글씨도 작고 자간과 행간이 좁은 옛 책들에게 작별을 고하게 됐다. 최근 이어지는 고전 독서 감상문은, 반평생이 넘도록 내 곁을 지켜준 책들에게 마지막으로 보내는 경의와 감사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달과 6펜스』는 내가 처음 접한 서머셋 몸의 작품이다. 별 생각 없이 책을 살피는데 가격표의 '5,500원'이라는 금액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책장을 넘기는데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책갈피. 오래 전 학창 시절 이런 패턴의 테두리를 넣어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 받거나, 다이어리를 꾸미거나 하다가, 책갈피에도 비슷한 무늬를 넣어 그렸던 기억이 났다. 도대체 언제 산 책인지 궁금해 이리저리 돌려보니 서점에서 찍어준 판매일자 도장이 보인다.

'99. 12. 25' 순간 근 20년 전의 크리스마스 풍경이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떠올랐다. 명절이나 각자의 생일, 크리스마스처럼 특별한 날에 우리는 부모님을 따라 서점에 가서 각자 사고 싶은 책을 고르곤 했다. 신간을 확인하는 설렘, 여러 권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추려내야하는 순간 찾아오는 고뇌, 마지막 두 권을 놓고 최종 선택을 하기 직전 느끼는 초조함, 그리고 부모님이 두 권 모두 허락하셔서 계산대로 향할 때 쏟아지는 환희까지... 깨알 같은 판매일자 도장 하나의 너머에 끝없는 추억이 펼쳐지면서 묘한 감상에 잠겼다. 아련하지만 따뜻하고 두근거리는 모든 것들이 그 속에 숨어있었다. 


서머셋 몸 W. Somerset Maugham(1874-1965)

서머셋 몸은 '통속 작가'라는 혹평을 받으면서도 일관된 작품세계를 고수하며 자신의 체험을 중요시했다. 그는 객관적인 리얼리즘에 입각하여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을 추구했다.

대표작으로는 「인간의 굴레」와 함께 「달과 6펜스」가 있는데, 이 중 「달과 6펜스」는 프랑스 화가 폴 고갱을 모델로, 예술에 대한 정열의 상징인 '달'과 물질 문명의 가치 기준이라 할 수 있는 돈의 상징인 '6펜스'를 통해 진정한 삶은 풍요로운 물질보다는 순수한 정신세계에 있음을 보여준 작품이다.


-본저 인용 후 2차 가공


서머셋 몸의 작품집 『달과 6펜스』에는 동명의 소설 「달과 6펜스」와 「비」, 「레드」까지 총 세 편의 작품이 실려있다. 


리얼리즘 : 실감나게 불쾌해지는 현실의 힘

바로 앞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에 대해 적으면서 그의 작품을 좋아하긴 하지만 읽으면 기분이 나빠진다는 내용을 언급했다. 그의 소설들은 철저하게 자연주의에 입각해 집필되었기 때문에, 주인공의 인생을 미화하기는커녕 나락으로 떨어뜨려 처절한 비극적 운명을 실감케 하기 때문이다. 등장인물들에게 그렇게 쓰라린 고통을 안겨주어야만 했던 작가를 원망하면서 읽어내려가기도 했다. 꼭 그렇게 죄다 신세를 망쳐야 속이 후련했냐!!!

비슷하게도 서머셋 몸의 작품을 읽을 때 역시 기분이 급격히 불쾌해진다. 그러나 그 화살은 작가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가 묘사하는 인물의 가치관, 그것을 바탕으로 그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로 향한다. 내 비판의 잣대―라고 쓰고 쌍욕이라고 읽는다―가 때로는 이상을 위해 모든 걸 버리고 세상을 등진 이에게, 때로는 더없이 고결한 성자인 척 하면서 작은 유혹에 덧없이 무너지는 위선자에게 맞추어진다.


서머셋 몸의 예술관을 다시 생각하며 : 달도 아름답지만 6펜스도 소중하다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는 속물이다 못해 비열하기까지 한 인물들에게 넌더리가 났었다. 작가가 나를 인도하는 대로 충실히 따라가면서,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맞장구치기도 했다. 나는 참으로 온순한 독자였던 셈이다. 하지만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다시 읽어보니 서머셋 몸이 지향하는 가치가 과연 절대적인 것일까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그 그림에는 말할 수 없는 관능적인 정열이 넘쳐 있었는데, 또한 밑바닥에는 그에게 전율과 공포를 느끼게 하는 그 무엇이 숨어 있었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게 대자연 속으로 파고들어가 아름답고도 무서운 갖가지 비밀을 포착한 인간의 작품이었다. 즉 그것은 인간이 알아서는 안 될 여러 가지 신성한 비밀을 찾아낸 인간의 작품인 것이다. 그 그림에는 어딘가 모르게 원시적인 아름다움과 함께 두려운 무엇인가가 감돌고 있었다.

- 본저 p.241에서 인용


「달과 6펜스」에서 다루는 이 찰스 스트릭랜드라는 인물은, 주식 중개인으로서의 안락한 삶을 버리고 가족마저 등진 채, 오로지 그림에만 몰두하기 위해 타히티 섬으로 떠난다. 모든 게 갖춰진 6펜스의 삶을 내던지고 달을 따라간 것이다. 서머셋 몸은 '달'로 대변되는 예술적 가치를 칭송하는 동시에 '6펜스'의 달콤함에 길들여진 이들을 비판한다. 그는 이러한 의도를 숨기는 바 없이 작품 전체에 걸쳐서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정해진 자리에서 철저히 자신의 역할을 다한다.

근 10년―나는 같은 책을 여러 번 반복해 읽는 버릇이 있는데, 이 작품 역시 처음 산 이후 대학생이 돼서 다시 읽어보기도 했다―만에 이 책을 다시 읽어보니 이런 장치들이 작위적이면서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서머셋 몸이 통속 작가라는 혹평을 받은 건 아마 이런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그의 작품을 즐겨 읽는 건 아니지만 단편 「점심」을 읽고는 그를 보는 시선이 바뀌었다(언젠가 블로그에도 꼭 소개하고 싶다). 그 작품에서 서머셋 몸이 보여주는 유머러스함은 잘 갈아놓은 식칼이 그러하듯 아주 번뜩인다. 마치 로알드 달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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