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인된 호박죽에 얽힌 추억
by 첼시
엄마가 시장에서 사다주신 호박죽은 많이 달지 않고 구수하면서 입에 착착 붙는다.
호박죽과 호박범벅의 중간 쯤 된다고 해야하나... 무르게 익은 팥과 쫀득한 새알심도 좋다.
이 맛있는 호박죽을 먹다가 문득 예전에 사진만 찍어놓고 봉인해둔 호박죽이 생각났다.
ㅋㅋㅋㅋㅋㅋ 이 호박을 볼 때마다 웃음이 나네.
호박죽을 만들려다가 시원하게 말아먹는 바람에 그동안 내내 봉인해두었던 사진이다.
내 사진첩에는 [봉인]이라는 폴더가 따로 있다.
찍은지 너무 오래되어 시기가 안 맞거나, 음식을 만들었는데 망해서 글을 올릴 수 없는 사진들이다.
아, 호박 껍질은 과일처럼 슥슥 깎는게 아니라 나무 깎듯이 조금씩 겉을 잘라내야한다.
이런 청둥호박(잘 여문 늙은 호박) 말고 단호박 껍질을 깔 때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해서 호박오가리를 만들었었다.
이 호박오가리를 떡에 쓰려고 했었는데 냉동실에 두고 잊어버리는 바람에 버려야했다.
참고로 이 사진은 작년 5월에 찍은 것이다.
이 호박오가리를 보면, 그리고 늙은 호박을 보고 있으면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가 생각난다.
"금년에는 호박오가리가 우찌나 달든지 생청 겉더라.
그래서 팥하고 찹쌀하고 넣어서 고았더니 세가 설설 녹게 달더고나"
- <토지> by 박경리
호박이 꿀처럼 달아서 혀가 살살 녹을 정도라니...! 난 이 구절이 참 좋다.
<토지>에서 인물들간의 관계, 역사적 흐름을 읽을 수도 있지만, 이런 미시적인 문화를 접하는게 더 좋다.
그리고 이게 문제의 (망한)호박죽.
유난히 더 달다는 호박속과 불린 찹쌀, 설탕, 소금을 넣었었다.
물 넣고 호박을 삶다가 블렌더로 붕붕 갈아주었다.
설탕과 소금을 넣어서 간을 했었지.
말아먹은 요리를 복기하는 기분은 참 묘하다.
호박죽이 풋내가 나서 영 먹을만한 것이 못 되기에 꿀과 팥앙금을 조금 얹었지만 구제하지 못했다.
1년 3개월이 더 지나고서야 이 사진을 열어보니 그래도 웃기는 추억이 된 것 같아서 재미있다. :D
하지만 앞으로는 호박죽을 만들지 않을테다. 시장표 호박죽이 훨씬 맛있기 때문에. :D :D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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