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lsea Simpson

[소설-일반]인형 by 대프니 듀 모리에

by 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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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책에 대한 글을 단 한편도 쓰지 않았다는 것을 연말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블로그를 처음 개설했던 2013년 이래 햇수로 9년차인데 처음으로 글(文)에서 글(書)이 빠진 해를 보낼 수도 있겠구나.

비어있는 한 자리를 채울 수 있는 작품을 고민하다가 이번 해에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인 『인형』을 택했다.

 

대프니 듀 모리에 Daphne du Maurier(1907-1989)

대프니 듀 모리에는 '서스펜스의 여왕'으로 칭송받는 20세기 영국의 가장 대중적인 작가 중 하나이며, 스릴러의 거장인 히치콕 감독의 영원한 뮤즈이기도 하다. 그녀는 소설, 논픽션, 희곡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히 작품 활동을 했으며, 특히 단편 소설에서 특유의 공포와 서스펜스가 결합된 작품을 여러 편 선보였다.

1969년 대프니 듀 모리에는 문학적 공헌을 인정 받아 데임 작위―남자의 기사 작위에 해당하는―를 받았고, 1977년에는 미국 미스터리 작가 협회로부터 그랜드 마스터상을 받았다. 대표작으로는 「레베카」, 「자메이카 여인숙」, 「새」, 「지금 쳐다보지마」 등이 있다.

 

-현대문학 출판 『지금 쳐다보지마』 작가 소개글 인용 후 2차 가공

 

 『인형』은 대프니 듀 모리에의 소설 중에서도 매우 초창기인 1926~1932년 사이에 쓰인 작품들을 모은 단편집이다. 발표 순이 아닌 저술된 순서대로 소설이 실려있으며 「동풍」, 「인형」, 「그러므로 이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성격 차이」, 「절망」, 「피카딜리」, 「집고양이」, 「메이지」, 「오래가는 아픔은 없다」, 「주말」, 「해피밸리」, 「점점 차가워지는 그의 편지」, 「인생의 훼방꾼」 순으로 총 열세 편의 작품이 실려있다. 한 편당 길이가 20~30페이지 정도이고 짧은 것은 10페이지를 조금 넘는 분량이어서 차근차근 읽기 좋았다.

 전술한 모든 작품이 대프니 듀 모리에의 20대 초중반 시절에 쓰였다는 사실은 놀라우면서도 경탄을 자아내는 일이다. 하지만 이를 주목하는 것이 오히려 작가의 연령이라는 틀에 그 천재성을 가두는 경홀함이라 여겨져 이번에는 작품 자체에 대한 감상만 기록하려 한다.

 

"The child destined to be a writer is vulnerable to every wind that blows." - Daphne du Maurier

 작품 내용에 대한 직접적 서술은 단 한 편, 단편집 제목과 같은 『인형』에 한해서 하고자 한다.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맨 아래쪽에 접은 글로 둔다. 수록작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오묘하고도 은근하게 흘러간다. 극적인 사건의 전개와 요동치는 감정의 파고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다소 밋밋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소제목―The child destined to be a writer is vulnerable to every wind that blows―처럼 '불어오는 모든 바람에 예민한' 독자라면 어느새 그녀가 이끄는 대로 자신을 맡긴 채 낙엽처럼 어지러이 흩어지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다. 자욱하게 깔린 해무처럼 이야기는 읽는 이의 가슴을 지그시 짓누른다. 소설 속 인물들은 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고 스스로의 내면으로 깊이 파고들며 괴로워한다. 겉보기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어제와 오늘의 상황은 완전히 바뀌어있다. 마치 한 편의 산문시같은 문장이 읽는 이의 마음에 잔잔한 돌풍을 일으킨다.

 작가의 또다른 단편집 『지금 쳐다보지마』는 마치 팽팽한 현을 당기듯 등골이 서늘해지는 긴장감이 작품 전체에 스며있었다. 이에 반해 『인형』은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는 황무지에 홀로 서서, 저 멀리 아득한 바다에서 위태롭게 일렁이는 부표를 어쩐지 같은 처지인 듯 서글피 바라보다가,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왈칵 새어나오는 울음을 애써 삼키며 쓸쓸함을 억누르는 듯한 복잡한 심리가 깔려있다.

 

아아, 그를 앙모하며 존외하는 마음을 모두 다 표현할 수는 없지만, 이 졸고로 대프니 듀 모리에 작가에게 경의를 표하며 올해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인형 THE DOLL』 by Daphne du Maurier(1928)

작품의 소재이자 제목인 The Doll은 번역하지 않고 원제 그대로만 적는다.

 

접은 글 스포일러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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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은 액자식 구성이며 E. 스트롱맨 박사의 편지로 시작한다. 그는 우연히 줍게 된 수첩에 적혀있던 이야기를 옮긴다는 설명과 함께 수첩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는 말을 덧붙인다. 다른 인물들과 다르게 수첩의 주인인 '나'의 이름은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나'는 어떤 모임에서 '리베카'라는 여인을 알게 되는데 그녀의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푹 빠진 뒤 리베카에게 열렬히 구애하여 만남을 가지게 된다.  리베카는 '나'의 끊임없는 간청에 그녀가 사는 곳을 알려주고 그 후로 '나'는 종종 그녀를 찾아가지만 어쩐지 처음 연주를 하던 날과는 다른 리베카의 태도에 낯섦을 느낀다. 그녀는 때때로 다정하고 쾌활하지만 어떤 날은 나른한 듯 무심하게 굴다가 다른 날은 광기에 사로잡힌 듯 열정을 사르기도 한다. '나'는 그러한 리베카로 인해 혼란스러워하면서도 그녀에 대한 갈망을 잠재우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리베카는 '나'에게 한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방문을 열며 그 안에 있는 The Doll '줄리오'를 소개한다. '나'는 줄리오를 보며 형언하기 힘든 혐오감과 불쾌함을 느끼지만 리베카는 크게 아랑곳하지 않는 듯하다. 얼마 간의 시일이 흐르면서 '리베카'의 마음이 차츰 열린다고 여긴 '나'는 자정을 넘긴 시간에 예고도 없이 그녀의 집에 들이닥친다. 불길한 공포와 함께 '나'를 맞이하는 것은 '줄리오'와 색사를 즐기는 리베카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충격을 받은 '나'에게 떠나라고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인 뒤 자취를 감춘다.

 

□대프니 듀 모리에의 다른 작품에 대한 감상 모음

2015.08.20 - [소설-일반]레베카 by 대프니 듀 모리에

2018.07.18 - [소설-일반]대프니 듀 모리에 단편선(지금 쳐다보지 마 外 8편) by 대프니 듀 모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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