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덫>은 내가 처음 읽었던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이다. 당시 학교 도서실에서 발견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크리스티의 명성 하나만 믿고 읽었다. 추리소설의 전형적인 방식인 '고립된 배경'과 '낯선 인물들'의 조합으로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다. 이미 유수의 추리소설을 섭렵한 현대 독자들에게는 다소 밋밋한 인상으로 다가올 수도 있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히 긴박감 넘치는 구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몽스웰 여관을 배경으로 일어나는 연속적인 살인사건을 다룬 소설이다. 아직 신혼인 자일즈와 몰리 데이비스 부부는 친척에게 물려받은 저택을 여관으로 개조해 손님을 받기 시작한다. 여관에는 괴짜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 매사에 불평만 늘어놓는 보일 부인, 퇴역 군인 메트카프 소령, 음흉해보이는 외국인 장사꾼 파라비치니 등 다양한 숙박객이 찾아온다. 몰아치는 눈보라로 인해 여관은 고립되고, 몰리 부인은 경찰로부터 여관에 경사가 파견될 것이라는 전화를 받는다. 이윽고 찾아온 트로터 경사는 얼마 전 런던에서 발생한 살인사건과 이 여관이 관계가 있다며 데이비스 부부와 숙박객들을 탐문하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전화선이 끊기면서 몽스웰 여관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고 그 와중에 보일 부인이 목졸려 살해당한다. 트로터 경사는 오래 전에 일어났던 롱리지 농장 사건의 피해 아동이 범인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여관에 있던 사람들로 하여금 보일 부인이 살해될 당시를 재현하도록 한다. 혼자 남겨진 몰리에게 트로터 형사가 다가와 롱리지 농장 사건에 대해 다시 추궁하고 그녀에게 총구를 들이댄다. 트로터 형사는 당시 롱리지 농장에 입양돼 학대 받던 아동의 형이었고, 몰리가 자신의 동생을 죽도록 방치했다고 오인해 그녀를 살해하려 한 것이다. 몰리가 위험에 처한 순간 메트카프 소령이 재빠르게 트로터를 제압하고, 자신이 런던 경시청에서 파견된 태너 경감이었음을 밝힌다.
어린 나이에 이 작품을 접했을 때는 정말 무서웠다. 그 때는 <쥐덫> 한 작품만 수록된 얇은 책을 봤는데 몇 장 되지 않는 일러스트가 어찌나 실감나던지 며칠, 아니 몇 달 동안 트로터 형사의 광기어린 표정에 시달리면서 잠을 설쳤다. 극중 인물 중에서 가장 신뢰를 주어야할 위치인 경찰이 알고 보니 무서운 살인범이란걸 깨달았을 때의 공포는 쉽게 떨치기 힘든 것이었다.
심리 트릭을 뛰어넘어라 : 홈즈보다 더 비인간적인 마플 양의 위력
소개가 좀 늦었는데, 해문출판사의 <쥐덫>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단편집으로 <쥐덫>, <이상한 사건>, <줄자 살인사건>, <모범하녀>, <관리인 노파>, <4층 아파트>, <조니 웨이벌리의 모험>, <스물네 마리의 검은 티티새>, <연애탐정> 순으로 수록되어있다. 지난번 언급했듯이 해문출판사의 크리스티 시리즈는 표지가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하고 글씨체와 목차 편집 등이 묘하게 촌스러워서 더욱 정이 간다.
일전에 홈즈의 추리는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추론을 바탕으로 하고 객관적인 물증에 입각해있는 반면에, 포와로와 마플 양은 심증, 인물의 성향 등을 통해 인물의 행동을 예측해 결론을 이끌어낸다고 비교한 적이 있다. 그 중에서도 마플 양은 일상적인 상황 속에서 비일상적인 단서를 분리하여 섬세하게 짚어내는 추리를 하는 것이 특징이다. 홈즈는 증거를 수집하고 범행 수법을 조사하느라 부지런히 움직이기라도 하지, 호호아줌마처럼 가만히 앉아있다가 조용히 범인을 잡아내는 마플 양의 추리력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참 비인간적인 느낌이다.
마플 양의 활약 : <이상한 사건>과 <줄자 살인사건>
<이상한 사건>은 애드거 앨런 포의 <도둑맞은 편지>를 연상케 하는 트릭이 돋보인다. <도둑맞은 편지>에서는 편지봉투를 뒤집어서 위장하는 트릭이 등장했는데, <이상한 사건>에서는 고가의 우표를 편지봉투에 붙여 위장하는 방식으로 유산을 상속한다. 핵심적인 단서를 평범한 것인양 위장하는 방식이 유사하다. '나뭇잎을 숨기려면 숲에 숨겨라. 숲이 없다면 숲을 만들어라'는 구절을 떠올리게 하는 트릭들이다.
<줄자 살인사건> 역시 마플 양의 조용한 저력을 보여주는 단편이다. 스펜로우 부인이 교살된 채로 발견되지만 범행을 추측할만한 증거가 전무한 상태. 목의 상흔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가느다란 끈 같은 것에 목이 졸렸다는 사실 뿐이다. 마플 양은 사건 현장을 검수했던 순경이 주웠다는 가느다란 핀을 보고, 그것이 양재사들이 사용하는 특수한 핀임을 알아본다. 이를 바탕으로 그녀는 스펜로우 부인이 양재사인 폴릿 양의 줄자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것을 밝혀낸다만... 제목을 <줄자 살인사건>으로 달아두면 제목부터 스포일러... 트릭은 재미나는데 작가가 지능적 안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