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게 눈 속의 연꽃 by 황지우
by 첼시황지우(1952~)
시인 황지우는 195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서울대 인문대 미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 <연혁(沿革>으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하고, <대답 없는 날들을 위하여> 등을 『문학과 지성』에 발표함으로써 등단했다.
황지우 시인의 네번째 시집인 『게 눈 속의 연꽃』에서 그는 현실과 이상 세계의 갈등을 단순히 지양하거나 도피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고, 두 세계의 경계를 지워나감으로써 갈등을 화엄(華嚴)의 경지로 승화시킨다. 그의 작품세계에서 비치는 불교적 색채는 그의 형인 혜당(慧撞) 스님(속명 황승우)의 영향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리한 것들이 꼬집는 현실
국내의 정규 교육과정을 밟은 이라면 황지우 시인의 작품을 한 번 이상 접했을 것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는 1983년 발표된 동명의 시집에 수록되어있다. 『게 눈 속의 연꽃』에서도 그는 예의 그 번뜩이는 기지를 내보인다.
위에 실린 <허수아비―南韓 이데올로기>에서 그는 '열다'라는 개념을 역설적으로 이용해 당시의 세태를 날카롭게 꼬집는다. 작품 속의 '열쇠'라는 기호가 주는 상징성은, 그 자체가 품고 있는 속성 때문에 오히려 반어적인 의미를 갖는다.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전문은 맨 아래에 별도로 소개한다.
황지우 시인이 발표한 유수의 사회참여적 작품들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다. 모든 객관적 상관물이 내 마음처럼 움직이는 시. 눈길이 가는 곳 어디든 감정이입을 깊이 하게 되는 시. 여러 각도로 해석될 여지가 있지만, 내게는 지극히 감성적인 서정시이다.
시를 한 글자 한 글자 곱씹어가며, 한 줄 한 줄 읽어내려가는 동안 이미지가 내 머리를 싸고 돈다. 구절구절마다 슬로우모션처럼 아주 더디게 움직이는 화면이 펼쳐진다. 기다림에 얽혀있는 기대감, 초조함, 불안함, 가슴이 두방망이질치다가 허탈해지고, 다시금 마음을 다잡는 순간까지 생생하게 표현되어있다. 머릿속은 이미 구만리 밖까지 질주하고 있건만, 당면한 현실은 너무나도 천천히 흐른다.
꼭 1년 전, 우지(宇治)로 가는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이 시를 읽었다. 그렇게 하고 싶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作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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