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일반]흡혈귀 by 장 마리니

2020. 3. 18. 06:30

장 마리니 Jean Marigny(1939-)

장 마리니는 프랑스 그르노블에 있는 스탕달 대학의 영미 문학 명예 교수이다. 그는 흡혈귀에 관해서는 전문가로, 고전 민담에서부터 현대적 신화에 이르기까지 두루 연구해왔으며, 이를 주제로 한 논문과 책을 여러 편 저술하였다.

- 출처 : 위키피디아(클릭)


미시사를 즐겨 읽는 내 취향에 잘 맞는 책. '흡혈귀'라는 초자연적 존재를 주제로 했기 때문에 저자의 상상력이 일부 개입한 부분도 있다. '야사' 수준에 가까울 정도로 그가 추측성 가설에 가깝게 서술한 부분은 다소 억지스럽게 느껴지지만, 주제 자체가 허구적인 이상, 독자도 반 쯤은 뱀파이어가 있다는 상상을 하며 읽는다면 소소한 재미를 맛볼 수 있다.


피, 생명력의 원천

흡혈귀 이전에 흡혈, 아니 그보다도 원초적인 '피'에 대한 갈망은 고대부터 있어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살아있는 생명체를 제물로 삼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그 과정에서 피를 바치는 것 역시 당연한 수순이었다. 살아있는 자의 몸 속에 흐르는 피는 곧 생명력을 의미하며, 이를 잃는 것은 당연하게도 죽음과 동일시되었다.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도 피를 마신 유령들이 활기를 되찾는다든지, 신이나 괴물이 생명력을 얻기 위해 흡혈하는 장면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피는 곧 모든 생물의 생명이다. 그것을 먹는 사람은 겨레 가운데서 추방하리라."

-「레위기」 17장 14절)


기독교 구약 성서에서는 피를 생명과 동일시하면서도 금기시하는데, 신약 성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성혈-재생이라는 키워드로 연결하였다. 이는 일반 대중이 피에 대해 갖고 있는 초자연적이고 신비로운 이미지를 오히려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종교 지도자들 뿐만아니라, 프랑크족의 왕이었던 샤를마뉴 역시, 성체의 신비와 이교의 믿음을 혼동하여 인간의 육체를 제물삼는 이들을 벌하는 등 피에 대한 지나친 숭상을 경계했으나, 이것이 중세 기독교 사회에서의 흡혈귀 숭배―다시 말해 악마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흡혈귀는 단지 상상이나 관념 속에서만 부유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14세기에 들어서면서 동부 프로이센, 실레지아, 보헤미아 지역을 중심으로 대중의 인식에 '흡혈귀'가 깊이 각인되었는데, 그 계기를 흑사병으로 보는 것이 정설로 자리잡고 있다. 당시 창궐하던 전염병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시체를 급히 파묻기 바빴는데, 이따금 미처 죽지 않은 이들이 관 속에서 공포에 휩싸여 탈출하려던 흔적―시일이 지난 주검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멀쩡한 시신, 관 속에 남은 핏자국 등―이 당대 사람들에게는 흡혈귀의 존재를 설명하는 증거로 보일 수 밖에 없었다.

흡혈귀의 모티브가 되는 실존 인물에 대한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의 루마니아에 속하는 고대 왕국 왈라키아의 왕자인 블라드 테페스는 적을 처형할 때 단순히 유희를 위해 그들을 말뚝에 꽂는 등 피에 굶주린 폭군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의 별명은 테페스(말뚝으로 박는 자)와 드라큘라(악마 또는 용)였는데, 브렘 스토커의 소설 『드라큘라』 역시 그의 별명에서 따온 것이다.

헝가리의 백작인 에르체베트 바토리 부인 역시 광기에 가까울 정도로 피에 집착했던 인물 중 하나이다. 그녀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영원히 유지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수많은 소녀를 납치해 그들의 피를 마시고, 그것으로 목욕을 즐기는 기행을 벌였다.


예술 작품 속 흡혈귀 : 초현실을 초월한 현실적 존재감

흡혈귀의 존재감은 18세기 후반 산업혁명 이후 역사 속 유물로 사라진 듯 희미해져갔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급속화됨에 따라 더이상 과거의 미신이나 꿈 같은 비이성적 사고가 삶에 비집고 들어갈 여지는 없어보였다. 당시 계몽주의와 실증 과학이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가운데 규범에서 어긋난 것들은 모조리 은폐되고 있었고,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낭만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

몰개성적인 이성주의와 물질주의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이들은 낭만주의를 표방하며 근대보다는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와 중세에서 영감을 구했다. 19세기로 접어들면서 팜므파탈적인 모습을 지닌 흡혈귀 요부가 많은 문학 작품에서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 중에서도 영국의 존 윌리엄 폴리도리의 소설 『흡혈귀』는 흡혈귀에게 지적인 면모를 더함으로써 널리 인기를 끌었다. 영국의 대중들은 흡혈귀와 관련된 문학이 점잖은 빅토리아 사회에서 일종의 해방구 역할을 한다고 여겨 더욱 열광했다.


브렘 스토커의 소설 『드라큘라』가 등장한 것도 이러한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흡혈귀 역사의 진정한 전환점으로 평가 받는다. 이 소설이 갖는 가장 중요한 의의는 고대에 머물러 있던 신화를 근대적으로 재구성했다는 점에 있다. 작품의 주인공인 젊은 법률가 조너선 하커는 유럽의 귀족인 드라큘라 백작의 토지 거래 상담을 위해 트란실바니아로 간다. 하커는 백작이 흡혈귀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의 악행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결국 드라큘라를 소멸시키는 데 성공한다.


『드라큘라』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 원인을 단순한 시대적 배경에 기대어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지적인 풍모를 뽐내는 유럽 귀족이면서 동시에 야만스러운 흡혈과 악행을 자행하는 초자연적 존재라는 속성, 그리고 그 악을 제압하는 영국의 젊은 법률가. 독자들은 소설을 읽어내려가면서 자신이 악마를 무찌르는 선역이 된 것인마냥 주인공에게 한껏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이것은 이방인에게 배타적이었던 영국 독자들에게는 대리만족과 함께 일종의 카타르시스마저 부여했다.

현대의 대중들이 흡혈귀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인간은 아닌 존재. 흡혈을 위해 목덜미를 물어뜯는 행위의 에로티시즘적 성격 등은 인간의 낭만적 상상력을 극대화할 뿐만 아니라 금기시되어있던 은밀한 욕망을 자극하는 기폭제 역할을 한다. 피를 마시고 부활하는 뱀파이어의 속성처럼 현대 사회 속의 흡혈귀 역시 공포와 동경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