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을 맞이하는 첼시세끼(3.29-4.4)
by 첼시3월 29일 일요일
원래 아침 먹던 시간이 한참 지난 다음에야 뭔가 먹어야지 생각하고 일어나서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전에 절반만 덜어놓고 다시 냉동실에 넣었던 낙지볶음밥이 있어서 달걀 하나를 부쳐 올리고 단무지와 낙지젓갈을 곁들였다.
익은 낙지와 젓갈인 낙지를 번갈아가며 먹으니 식감이 대비되어 재미있었다.
밥을 천천히 다 먹고 어제 산 딸기를 씻어 먹고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매콤한 낙지볶음밥과 새콤달콤하고 사각거리면서도 부드러운 딸기, 몸에 온기를 더해주는 커피의 향긋함을 오롯이 느끼며 인생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점심으로 전에 사두었던 묵은지를 넣은 김치찜을 만들었다.
정말 요리가 하기 싫고 다른 어떤 것도 할 의욕이 나지 않아 죽을 지경이었지만 이럴 때라도 몸을 움직여두는 게 좋으니까...
손이 바빠야 머리가 정리되는 걸 알기에 나혼자만이지만 젖먹던 힘까지 다해 질질 끌려가듯 음식을 했다.
완성된 김치찜은 재료가 좋아서인지 생각보다 굉장히 맛있어서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떤 감동까지도 느껴졌다.
저녁은 콩비지처럼 보이지만 크림 파스타.
아주 좋아하는 XO소스를 넣은 파스타여서 감칠맛의 향연이 입을 즐겁게 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해가 지면서 감정도 같이 곤두박질치는 바람에 자려고 누워있다가 그냥 펑펑 울어버렸다.
어른답게 의연해지고 싶은데 너무나도 많이 울어버려서 눈물로 만든 호수에 잠길 지경이었다.
비명을 지르며 울다가 흐느끼기도 하고 어깨를 들먹이다가 쓰러지듯 엎어져서 엉엉 다채롭게도 울었다.
스스로를 끔찍히 미워하다가 죽은 듯이 잠들었다. 지난주 꾸었던 꿈이 이루어졌군.
3월 30일 월요일
어제 남은 김치찜에 물을 좀더 부어서 국물 농도를 희석했다.
다소 싱거워진 국물도 맛있어... 역시 처음 느낀 감동은 헛된 것이 아니었군.
전날 입은 생채기를 치유하듯 천천히 식사했다.
내게 그다지 도움이 되는 일은 아니었으나 일단 내가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건 다행이라고 여겼다.
점심은 블로그 리뷰용이라서 미러리스로 촬영했다. 귀여운 볶음 너구리.
방전된 배터리를 채워야겠다는 생각이 들다보니, 기분이 좋아질만한 행동을 찾아서 하려고 애썼다.
원래대로라면 시작했어야하는 공부는 도저히 의욕이 나지 않아서 일주일 미루기로 했다.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편집하고 글을 쓰면서 느릿느릿 나를 충전했다.
저녁은 XO소스 크림파스타.
으으 이거 먹고 그 뒤에 또 이것저것 폭식하고 반납까지 최악의 레이스 한번 잘 뛰었다.
머리로는 판단이 잘 되는데 몸과의 공조가 쉽지 않다.
뭘 먹었는지 일일이 다 쓰기도 곤란할 지경이네.
심지어 나중에는 삼키기 힘들어지니 입 속에 음식을 넣고 씹다가 그냥 뱉기만 반복했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구제불능이다라는 생각을 했다가 1초만에 취소했다.
잠겨있지 않고 벗어나려고 죽을 힘을 다해 노력중이라는 것만으로도 잘하고 있는 거야.
내 자신도 음식도 적대시할 필요가 없다. 내일이 있게 만들어주는 동반자적 관계이니까 다투지 말고 화해하도록.
3월 31일 화요일
오전에 이디야에서 제일 좋아하는 자몽에이드를 주문했다.
많이 마시고 싶어서 큰 걸 시켰는데 다 마시고 10분 뒤에 반납했다.
뇌하고 위장하고 너희들 상의 좀 하고 결정하지 않겠니.
배고프다, 목마르다, 먹자, 마시자, 배부르다, 끔찍하다, 반납하자의 과정에 너무 망설임이 없잖아.
생각을 일단 하고 행동합시다.
라고 말해놓고 반납하자마자 맞은편 버거킹으로 이동하기. 하나만 해라 하나만
불고기소스가 들어간 버거 세트에 음료는 제로콜라로 바꾸고 컵 아이스크림도 하나 주문했다.
배부른 느낌을 못 참고 달려가버리는 게 문제이니 절반만 먹자. 다 먹지 말자.
그런데 막상 식사를 하려니 두입 만에 목구멍에 아교덩어리를 넣은 것처럼 꽉 막혀 넘어가지를 않았다.
좋아하는 불고기소스의 단맛이 역하고 불향이 거슬렸다. 분명히 내가 아주 좋아하던 그 맛인데.
콜라는 그나마 액체여서 어떻게 넘길 수는 있었으나 쇠스랑이 혀와 식도를 훑고가는 느낌이 났다.
감자튀김을 베어물고 씹는 게 힘에 부쳤다. 가죽끈 같은 걸 씹고 있는 기분이었다.
오픈하자마자 주문한 거라서 갓 튀긴 걸 받은 건데 고소한 감자 향기가 묵은 흙냄새 같았다.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어보려고 했으나 두 숟갈 뜨고 나니 우유 비린내가 나를 집어삼킬 것처럼 비강에 가득찼다.
1/4 정도 먹고나니 좀전의 상황을 바로 반복할 것 같아서 식사를 멈췄다.
마침 정리하려는데 준이에게 전화가 왔다. 자기도 오늘 속이 좋지 않아서 식사를 안 한다고.
나도 좀전에 있었던 일을 있는 그대로 말하고, 이제 집에 가려는 참이라고 말했다.
본인도 식사 못 했을텐데 걱정하게 만들어서 좀 미안하네.
저녁은 떡볶이를 포장해와서 먹었다.
1인분 분량에서 떡 세 개만 빼달라고 부탁 드리고 값은 제대로 드리고.
실은 그냥 1인분 그대로 받아와서 떡을 일부 버린 다음에 먹을까 고민했었다.
그런데 엄마가 그러면 음식을 혐오하는 게 습관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하셔서 일부러 미리 적게 달라고 말씀드렸다.
엄마 말 듣기를 잘했다. 역시 엄마는 아시는 게 많아.
낭비되는 포장재가 아까워서 밀폐용기를 가지고 가서 거기 담아왔다.
이 정도면 내가 먹기에는 충분한 양.
밥 먹기 전에 우유 반 잔 마시고 토마토도 하나 씻어서 곁들였는데 배가 차버려서 기분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실수하지 않으려고 먹으면서 계속 '천천히', '맛있게'를 속으로 되뇌었다.
저녁을 먹은 뒤 두어 시간 정도 지나니 또 뭔가가 먹고 싶어졌다.
햇반을 절반 덜어서 참치 통조림과 함께 아주 천천히 먹었다. 오롯이 내 것으로 만들겠다고 생각하면서.
다행히 다 먹은 뒤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새벽에 몇 번 깨어버려 피곤하긴 해도 비교적 잘 잤다.
4월 1일 수요일
여느 때와 같은 샌드위치로 아침을 열었다.
어제 저녁은 떡볶이로 끝냈으면 좋았을 테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마무리한 게 다행이다 싶고.
피클을 넣은 샌드위치는 상큼하고 아삭거리는 맛이 좋았다.
어제의 일렁거림이 거짓말처럼 걷혀서 기분이 가벼워졌다.
점심은 어제 먹고 남은 햇반 절반과 묵은지 김치찜.
맛있다. 맛있어... 기분 좋게 먹고 간식도 조금씩 챙겨먹었다.
소화제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무사히 점심도 넘겼다.
오후부터 우기가 시작되었다.
이럴 때 치킨을 먹으면 딱 좋을 것 같긴 하지만 아직 섭식 패턴이 안정되지 않은 것 같아서 고민하다가 아침에 먹은 샌드위치를 한번 더.
여기에다 반 개 분량의 샌드위치를 추가로 만들어서 마저 먹는 것으로 기분 좋게 식사를 마무리했다.
지난주부터 이어진 반납 때문에 성대 쪽이 상해서 목소리가 칼칼해졌기 때문에 조심, 또 조심하면서 지내고 있다.
잠긴 목이 어서 돌아오면 좋겠다.
4월 2일 목요일
우기라고 적고 생리 혹은 월경이라고 읽는 때문에 자정을 넘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깨버렸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진통제를 두 번이나 먹었는데도 몸이 불타는 것처럼 아팠다.
전기요를 따뜻하게 데워놓고 잠이 오길 기다렸으나 허리부터 골반과 고관절까지 찌르는 듯한 느낌이 계속되었다.
잠은 이미 깨버렸고 슬슬 배도 고파지는 것 같아서 해 뜰 때 쯤 일어나 쌀을 씻어서 안쳤다.
아침도 조금 일찍 먹었다. 남은 김치찜 절반에 밥도 조금 덜어서.
따뜻한 김치찜에 새로 한 밥을 먹으니 속이 든든해져서 좋았다.
북모닝님의 팬케이크 가게 글을 보고(맛은 중략...이었지만) 나도 갑자기 팬케이크가 먹고 싶어져서 햇살 좋은 점심에 준비했다.
오랜만에 핸드 믹서 쓰다가 휘핑크림을 온 집안에 다 튀긴 것 빼고는(...) 별 문제 없이 완성했다.
손바닥보다 조금 큼직한 것이 세 장 나왔는데 그 중에 제일 예쁘게 부쳐진 것 한 장과 그 다음으로 예쁜 것 반 장 이렇게 절반을 먹었다.
향긋하고 새콤달콤한 봄 딸기에 우유 풍미 가득한 휘핑크림, 감미로운 메이플시럽에 부드럽고 고소하게 녹는 버터까지.
선물 같고 소풍 같고 마냥 좋은 식사였다. 팬케이크를 절반만 먹은 것도 좋은 선택이었다.
저녁은 치킨.
여기까지 먹고 나중에 더 먹고 싶어서 조금 더 데웠는데 속에서 받지를 않았다.
식욕과 포만감은 별개이니 배가 조금 찰 때까지만 식사를 하는 게 좋겠군.
아침은 남은 치킨에 김치찜에 국적 불명 식사.
밥은 너무 뻣뻣해서 사진 속에 있는 것 중 절반만 먹었다.
어제 사온 치킨이 꽤 남았으나 더는 먹고 싶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 나머지는 전부 치웠다.
점심은 새로 딴 바질과 토마토 듬뿍에 스파게티 조금 삶아서 넣은 샐러드.
향긋한 이탈리안 드레싱에 올리브오일까지 흩뿌리니 풀꽃 가득한 언덕을 뒹구는 느낌이었다.
향긋하고 새콤달콤하고 풋풋하고 아삭하고 좋아하는 노래 틀어놓고 오감을 자극하면서 즐겁게 식사했다.
저녁은 마트에서 사온 광어+연어 모둠회.
초밥 먹고 싶은데 미리 사오면 밥이 굳을 것 같고 회는 구성이 썩 마음에 들지 않고 엄청나게 갈팡질팡하다가 어렵게 골랐다.
연어는 기름진 부위 위주이지만 광어가 엔가와까지 고루 들어있어서 이 상품이 제일 괜찮아보였다.
조금 더 두툼했으면 좋았을테지만 종류가 다양해서 이래저래 씹는 맛도 감칠맛도 좋았다.
원래는 미도어묵도 하나 사오려고 했는데 그러지 않기를 잘했다. 회만으로도 양이 꽤 많았다.
4월 4일 토요일
남은 김치찜은 정말 싹싹 긁어담았다.
숟가락으로 대강 떠낸 스팸을 넣고 물을 조금 더 부어 따끈따끈한 김치찌개처럼 준비해서 먹었다.
햇반을 데울까 하다가 새로 한 밥이 먹고 싶어서 귀리 조금 넣은 쌀을 안쳤다.
스팸이 들어갔는데도 개운한 국물을 떠먹으니 따뜻함이 온몸에 그대로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묵은지는 잇몸으로도 씹을 수 있을 만큼 부드럽게 풀어진 상태여서 먹는 데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게 좋았다.
밥은 조금만 담았다가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사진에 있는 걸 다 먹고 절반 정도 더 떠와서 먹었다.
며칠 전까지는 살려주세요 라고 외치면서 눈을 감고 떴는데 오늘은 살겠다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물론 그 때도 행복했지만 지금은 더 행복해졌다.
점심은 닛신 카레메시에 피클과 치자단무지.
카레메시는 사실 별거 없는 그냥 카레밥이고 생긴 것도 꼭 전투식량 같은데...
난 이걸 홋카이도 여행하면서 지진 만났을 때 처음 먹었기 때문에 나름 각별한 추억이 어린 제품이다.
홋카이도에 머무르는 동안 삶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완전히 달라지게 해준 여행이어서 더 특별하지.
그때를 생각하면서 고이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아주 천천히 식사를 했고 8할 정도만 먹고 나머지는 치웠다.
한 마리와 순살만 취급하던 집 근처 치킨집에서 이제는 다리/날개 메뉴도 주문 가능하다기에 만세를 부르며 포장해온 맛초킹.
오랜만에 먹으니 아주 기뻤다. 천천히 맛있게 먹자.
어느 정도 먹을 수 있는지 이제는 슬슬 가늠이 되는 상태여서, 그 경계를 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먹었다.
참고로 치킨은 사진에 나온 것의 두 배를 먹었다. 다리 둘, 날개 둘, 봉 둘. ㅋㅋㅋ
좋은 기억이 있는 음식들을 먹는 시간은 참 행복하다. 이 기억을 잊지 말아야지.
섭식에 문제가 있을 때는 그걸 굳이 숨기거나 줄이지 않고 그걸 주변에 그대로 말하는 게 도움이 될 때가 있다.
혼자 삭이고 있을 때는 동굴 속에 외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별것 아닌 문제가 점점 불어나는 듯 나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굴 밖으로 나오면 어? 그냥 자갈 하나 떨어진 것이었어? 이런 느낌으로 상황이 정리되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블로그에 이 글을 계속 적어보는 것도 문제를 직시하고 마음결을 정돈하기 위해서이다.
털고 털고 털어내다보면 점점 닳아서 없어질 것이란 희망을 갖고 있으니까.
다만 피로도가 높은 글을 계속 접하실 블로그 손님들께는 죄송하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어요.
'오늘 > 첼시세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아질 일만 남은 첼시세끼(4.5-4.11) (6) | 2020.04.12 |
---|---|
3월을 마무리하는 첼시세끼(3.22-3.28) (12) | 2020.03.29 |
봄날의 첼시세끼+부상 일지(3.15-3.21) (8) | 2020.03.22 |
블로그의 정보
Chelsea Simpson
첼시